뿌린대로 거둔다
한 인간의 삶은 지구보다 무겁고 하늘보다 높으며 땅보다 깊다. 태양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자연도 변화하며, 자연을 이용하는 인간도 변화하며 인간이 조직한 사회도 변화하고 인간들의 지적 창조물도 변화한다.
사전적 의미로 '외부적 요인에 의한 변화'와 '내부적 요인에 의한 변화'를 각각 '영향 받음'과 '자각'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해가 뜨고 진다는 불변의 진리만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변함없이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은 진리만큼이나 힘든 법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에는 늘 나름의 법칙이 있다.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1대 29대 300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이 법칙은 발표된 1920년대 이후 실패와 성공의 징후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 법칙을 간단히 정리하면 심각한 안전사고가 1건 일어나려면 그전에 동일한 원인으로 경미한 사고가 29건, 위험에 노출되는 경험이 300건 정도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산업재해에서 시작한 이 법칙의 적용은 성공과 실패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잘되는 것도 못되는 것도 행복도 불행도 그만한 원인이 있어 그런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그 뿌린 대로 운명을 수확하게 된다. 요행이란 없다. 노력을 많이 하면 많이 한 만큼, 노력을 안 하면 안한 만큼 그대로 운명이 형성된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신념이 없이는 심을 수가 없다. “종두득두(種豆得豆) 종과득과(種瓜得瓜)라는 말처럼 콩 심은데 콩 나고, 오이 심은데 오이 난다”고 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야 열리는 과실나무는 지금 현재 그 실재가 보이지 않더라도 굳은 신념과 정성이 그침이 계속되어야만 그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긴 호흡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혼을 담아 거름을 주고 땀을 삼아 물을 주어야 한다. 삶의 길은 남에 의해 정해진 운명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일은 내가 어떻게 대응하여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일에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가 결정된다. 특히,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 자기 스스로 번뇌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노력이 삶의 의의를 가져다주는 열쇠가 아닐까 한다.
난 가끔 대형서점에 들려 ‘경제학’, ‘부동산’, ‘리더쉽’ 등 미래의 성공과 관련된 분야의 책들의 방대한 판매량을 보고 ‘성공을 향한 사람들의 희망’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노력’없이는 안된다.
16세기의 유명한 정치이론가였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운명의 여신에 대해 언급한다. 흔히 포루투나(운명)라고 불리는 운명의 여신은 어떤 일에건 용맹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비루투(덕)에게 끌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운명은 ‘여’신이기 때문에 ‘남’성적인 용맹함에 끌린다는 점이 자칫 남성우월주의라는 인식을 낳게 했지만,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개척할 줄 아는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처럼 운명이라는 것 역시 반드시 정해진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의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면,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 연단, 자기 스스로 번뇌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노력이야말로 삶의 의의를 가져다주는 결정적인 열쇠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10분 일찍 일어나고, 작심삼일을 경계하고, 시작의 결단을 주저 없이 내리는 등 의외로 간단한 노력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미래에 대한 작은 씨앗을 심고 이 씨앗이 새싹이 되고 줄기와 잎이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긴 호흡으로 바라보자. 그리고 좀 더 튼실하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정성을 다해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보자.
2009년 5월 18일 안규백
뿌린대로 거둔다
한 인간의 삶은 지구보다 무겁고 하늘보다 높으며 땅보다 깊다. 태양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자연도 변화하며, 자연을 이용하는 인간도 변화하며 인간이 조직한 사회도 변화하고 인간들의 지적 창조물도 변화한다.
사전적 의미로 '외부적 요인에 의한 변화'와 '내부적 요인에 의한 변화'를 각각 '영향 받음'과 '자각'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해가 뜨고 진다는 불변의 진리만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변함없이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은 진리만큼이나 힘든 법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에는 늘 나름의 법칙이 있다.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1대 29대 300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이 법칙은 발표된 1920년대 이후 실패와 성공의 징후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 법칙을 간단히 정리하면 심각한 안전사고가 1건 일어나려면 그전에 동일한 원인으로 경미한 사고가 29건, 위험에 노출되는 경험이 300건 정도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산업재해에서 시작한 이 법칙의 적용은 성공과 실패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잘되는 것도 못되는 것도 행복도 불행도 그만한 원인이 있어 그런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그 뿌린 대로 운명을 수확하게 된다. 요행이란 없다. 노력을 많이 하면 많이 한 만큼, 노력을 안 하면 안한 만큼 그대로 운명이 형성된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신념이 없이는 심을 수가 없다. “종두득두(種豆得豆) 종과득과(種瓜得瓜)라는 말처럼 콩 심은데 콩 나고, 오이 심은데 오이 난다”고 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야 열리는 과실나무는 지금 현재 그 실재가 보이지 않더라도 굳은 신념과 정성이 그침이 계속되어야만 그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긴 호흡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혼을 담아 거름을 주고 땀을 삼아 물을 주어야 한다. 삶의 길은 남에 의해 정해진 운명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일은 내가 어떻게 대응하여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일에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가 결정된다. 특히,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 자기 스스로 번뇌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노력이 삶의 의의를 가져다주는 열쇠가 아닐까 한다.
난 가끔 대형서점에 들려 ‘경제학’, ‘부동산’, ‘리더쉽’ 등 미래의 성공과 관련된 분야의 책들의 방대한 판매량을 보고 ‘성공을 향한 사람들의 희망’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노력’없이는 안된다.
16세기의 유명한 정치이론가였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운명의 여신에 대해 언급한다. 흔히 포루투나(운명)라고 불리는 운명의 여신은 어떤 일에건 용맹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비루투(덕)에게 끌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운명은 ‘여’신이기 때문에 ‘남’성적인 용맹함에 끌린다는 점이 자칫 남성우월주의라는 인식을 낳게 했지만,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개척할 줄 아는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처럼 운명이라는 것 역시 반드시 정해진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의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면,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 연단, 자기 스스로 번뇌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노력이야말로 삶의 의의를 가져다주는 결정적인 열쇠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10분 일찍 일어나고, 작심삼일을 경계하고, 시작의 결단을 주저 없이 내리는 등 의외로 간단한 노력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미래에 대한 작은 씨앗을 심고 이 씨앗이 새싹이 되고 줄기와 잎이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긴 호흡으로 바라보자. 그리고 좀 더 튼실하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정성을 다해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보자.
2009년 5월 18일 안규백